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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건곡선생묘갈명(虔谷先生墓碣銘)
虔谷先生墓碣銘 順天府北住巖之阡有墓曰高麗中顯大夫典農寺副正趙公諱瑜之藏也渼湖金文敬公元行嘗撰表文有云仁莫大於父子義莫重於君臣公於此二者其所立足以炳烺千古噫斯可以盡之矣公後孫又伐石將竪碣于階下昇鉉等屬不佞銘之遂按而爲之説曰公淳昌人號虔谷檢校大將軍諱璋其高祖也曾大父諱洪珪版圖判書大父諱佺文科追封府院君考諱元吉門下侍中與鄭圃隱廢辛昌策勳封玉川府院君凡三娶而公即繼配復興趙氏出也生於 忠穆王丙戌幼有至誠喪母能致哀謹禮居後母憂亦如之父歿躬負土營葬蓋麗末通喪之制不行士大夫喪其親者皆百日即吉惟公前後皆服三年而日省于墓不以風雨廢也恭愍壬寅登進士文科歷都僉議事評理事贊成事至副正麗社既屋固守罔僕之義我朝累徵以靈光郡事漢城判尹皆不起退遯于淳昌虔之谷後徒順天之謙川放浪林泉潔身以沒世即 宣德戊申五月而壽八十三英陵命給守塚三戶旌其閭曰孝子前副正以不臣成公之志也麗朝進士朴綏過公遺墟而留詩與吉注書並稱有忠孝雙全此一廬之語思庵朴文忠公淳亦曰南中節義惟趙副正一人而已章甫又建祠而爼豆之公卓行峻節可以有辭於千秋矣古語曰孝實天經忠爲令德百行攸先一心靡忒其公之謂歟配潭陽鞠氏同塋有二子長曰斯文司正 贈叅議季曰崇文兵使諡節愍叅議四子智山階僉樞智崑縣監智崙察訪智崗 贈參判皆以孝友聞築亭扁以相好同處湛樂有楊延壽家風節愍一子哲山當光廟世父子俱死於六臣嗚呼公之忠孝成敎於家能使世之遺親後君之人知所愧焉吁亦盛矣銘曰惟其忠君本乎孝親在公何怨求仁得仁用扶人紀靖獻厥身歌悲黍離氣薄蒼旻嵂彼住崗秋柏不死我發幽光昭揭千禩 德殷 宋秉璨 撰 逸祭酒淵齋 건곡선생묘갈명(虔谷先生墓碣銘) 순천부 북쪽 주암(住巖) 언덕에 묘소가 하나 있는데, 이는 고려 중현대부 전농시부정 조공 휘 유(瑜)의 유택이다. 미호(渼湖) 문경공(文敬公) 김원행이 일찍이 표문을 지었는데 거기에, ‘인(仁)은 부자사이보다 더 중한 것이 없고, 의는 군신 사이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 데, 공은 이 두 가지를 다 수립하여, 천고에 밝게 빛난다.’ 하였으니, 아, 여기에서 공에 대한 것을 다 말한 셈이다. 공의 후손들이 다시 돌을 깎아 갈(碣)을 계하(階下)에 세우려 하면서 승현(昇鉉) 등이 나에게 그 명(銘)을 부탁하여 왔다. 그래서 살펴 본 다음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공은 순창인이요, 호는 건곡(虔谷)으로 검교대장군 휘 ①장(璋)이 고조이며, 증조의 휘는 ②홍규(洪珪)인데, 판도판서요, 조고 휘 ③전(佺)은 부원군에 추봉되었고, 고의 휘는 원길(元吉)로 문하시중을 지냈는데, 포은 정몽주와 함께 창왕(昌王)을 내쫒고, 책훈되어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모두 세 부인을 맞았는데, 공은 계비(繼妃) 복흥조씨 소생이다 공은 충목왕(忠穆王) 병술년(丙戌年 一三四六)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정성이 있어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을 다하고 상례를 삼가 행하였고, 후모(後母)의 상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스스로 흙을 져다가 봉분을 쌓았다. 고려 때에는 三년상이 통행되지 않아 부모의 상을 치르는 사대부들이 모두 一백일 만에 복을 벗었다. 그러나 오직 공만은 전후의 상에 모두 삼년복을 입고 날마다 묘를 살폈는데, 비가와도 그만두지 않았다. 공민왕 임인년(一三六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도첨의사(都僉議事)·평리사(評理事)·찬성사(贊成事) 등을 거쳐 부정(副正)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절개를 지키는 의리를 굳게 하여 조선에 들어와 여러 차례 영광군 사 한성부 판윤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순창 건곡에 은거하였는데, 후에 순 천 겸천으로 이사하여, 산수 사이를 방랑하면서 몸을 깨끗이 지키다 세상을 마치니, 바로 선덕(宣德) 무신년(一四二八) 五월인데, 수는 八十三세였다. 세종께서 묘지기 三호(户)를 내려주고 정려(旌閭)를 「효자 전부정」이라 내렸으니, 이는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은 공의 뜻을 이루어 준 것이다. 고려의 진사 박수(朴綏)가 공의 유허를 지나다가 시를 남겼는데 거기에는 주서(注書) 길재(吉再)와 함께 칭하여 ‘충효가 겸비한 이 집안이네’ 하는 구절이 있다. 사암(思庵)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 역시 말하기를, ‘남쪽지방의 절의는 오직 조 부정(趙副正) 한 사람뿐이다」 하였다. 선비들이 또 사우를 세워 제사지내고 있으니, 공의 탁월한 절개는 가위 천추까지 전해질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효(孝)는 실2하늘의 벼리요, 충(忠)은 아름다운 덕이 되니, 모든 행실보다 앞세워 조금도 간특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배(配)는 담양국씨(潭陽鞠氏)로 같은 무덤이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사문(斯文)은 사정(司正)으로 참의(叅議)에 추증되고 작은 아들 숭문(崇文)은 병사(兵使)로 시호는 절민(節愍)이다. 참의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지산(智山)은 벼슬이 첨추(僉樞)요, 지곤(智崑)은 현감 (縣監)이며, 지륜(智崙)은 찰방(察訪)이요, 지강(智崗)은 참판에 증직되었는데, 모두 효우(孝友)로 알려졌다. 정자를 지어 상호정이라 편액하고 한 곳에 거처하면서, 즐겨 양연수(楊延壽) 집안의 가풍이 있었다. 절민공의 한 아들 철산(哲山)은 세조(世祖)때 부자가 함께 사육신과 같이 죽었다. 아! 공의 충효가 가풍을 이루어 세상에서 그 부모를 버리고 임금을 모르는 체 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였으니, 아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그의 임금에 대한 충성은 惟其忠君 어버이에 대한 효도에 근본하였네. 本乎孝親 공은 무슨 원망 있는가 在公何怨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求仁得仁 인륜을 부축하려 用扶人紀 자신을 바쳤네. 靖獻厥身 소리가 슬피 울리니 歌悲黍離 기운이 푸른 하늘에 지네. 氣薄蒼旻 저 높은 주암의 언덕에 嵂彼住崗 가을 잣나무 죽지 않아 秋柏不死 내가 그윽한 빛내어 我發幽光 천년 동안 밝히리. 昭揭千禩 덕은(德殷) 송병선(宋秉璿) 지음 註:송병선(宋秉璿 一八三六∼一九○五):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연재(淵齋) 송시열의 후손. 학행으로 제주(祭酒)에 기용된 뒤 서연관(書筵官) 대사헌을 지냈다. 一九 ○五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였고 그 뒤 왕에게 다시 상소하려다 좌절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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